“Shoot me first!(나를 먼저 쏘세요!)” 

지난 11일 미국 휴스턴 남서부에 위치한 레이크우드교회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30-35세 사이의 한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로 들어왔다. 그는 긴 소총을 들고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소총을 난사했다. 때마침 그곳에 있던 비번인 경찰과 다른 기관 소속 요원 하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여성이 함께 데려온 아이도 총에 맞아 위독한 상태이며 50대 남성 하나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교회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형교회로 <긍정의 힘>으로 유명한 조엘 오스틴이 목사로 있는 곳이다. 나는 우연히 뉴스에서 이 장면을 보았다. 총소리가 나자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의자 밑으로 숨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똑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다른 사건이 생각났다. 

2006년 10월 2일에 니켈 마인즈에 있는 아미시 학교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져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아미쉬 마을 인근에 살면서 주로 아미쉬 낙농가를 대상으로 우유를 수거해 온 트럭운전사가 아미시 원룸스쿨(One-Room School)에 들어가 10명의 어린 아미쉬 소녀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범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열 명의 아미시 소녀 중 다섯 명은 절명하였고, 나머지 다섯 명은 평생 동안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치명적인 장애와 마음에 상처를 안았다. 

레이크우드교회 교인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누가 피하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의자 밑으로 숨었다. 그러나 아미시 아이들은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범인 앞으로 나가 외쳤다. 

“Shoot me first!(나를 먼저 쏘세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범인이 겨누는 총구 앞에서 나이 어린 동생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아미시 소녀(Marian Fisher)가 범인에게 던진 침착하고도 애절한 이 한 마디의 절규, 호소였다. 마리안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리안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저마다 범인에게 자기를 먼저 쏘라고 외쳤다.

정말 대조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달랐던 것인가. 나는 아미시 소녀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레이크우드교회의 교인들은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난 것일까. 한 번 상상을 해보라. 그리고 만일 자신이 총기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지를 솔직하게 생각해보라.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회심의 변질>이라는 알렌 크라이더의 책이 생각난다.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회심에서 진정성이 사라졌음을 토로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의 회심이 변질되었을까?

“사도요한이 살아있을 때 쓰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클레멘트의 첫 번째 편지에는 이미 구약의 의식에서 빌려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나타나고 있다. 197년에 기록된 터툴리안의 작품에는 죽은 자와 유아에게 침례를 베푸는 관행이 번지는 사태를 비판하고 있다. 2세기 초에 이미 침례를 받음으로 중생한다는 교리가 확산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단의 탄생과 그 과정”에서 인용)

나는 어제 인용한 이 글에서 앞부분만을 해설했다. 오늘은 뒷부분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의 변질의 가장 큰 원인을 우리는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천당에 간다고 믿고 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복음 이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도 깊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들의 복음이해 역시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골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곁가지다.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세례와 성령 받음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세례는 성령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그 사랑대로 살기 위해 결단하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는 의식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물론 사도들의 안수라는 다른 요소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사도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역할로 일반화할 수 있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세례를 받고 그것만으로 구원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바로 아미시 소녀들과 레이크우드교회 교인들의 모습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리가 가지는 한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교리는 단순히 폭력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사실이 교리를 치명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교리는 인간의 성서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성령은 질식하고 복음은 사망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성령이 질식하고 복음이 사망한 그리스도교와 복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성령 받음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바울 사도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게 된다. 레이크우드교회 교인들처럼 살려고 하지 않고 아미시 소녀들처럼 기꺼이 죽는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이단을 판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자체가 이단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인간이 만든 교리에 절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그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 중심에 교리가 있고, 거기에 따른 회심의 변질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이단이 이단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주제넘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례를 받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도 아미시 소녀들처럼 반사적으로 “Shoot me first!(나를 먼저 쏘세요!)”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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